
어른이 되면 다 자유로울 거라고 믿었던 13살의 소원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어떨까요. 2004년 개봉한 〈13 Going on 30〉, 국내 제목으로는 〈완벽한 그녀에게 딱 한 가지 없는 것〉은 그 질문을 정면으로 들이밉니다. 저도 이 영화를 보면서 자꾸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13살의 내가 지금의 저를 본다면, 과연 흐뭇해할까요.
13살의 소원
이 영화의 핵심 장치는 타임 점프(time jump)입니다. 타임 점프란 서사 구조에서 특정 인물이 시간의 흐름을 건너뛰어 과거 또는 미래로 이동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주인공 제나는 13살 생일 파티에서 친구들에게 철저히 이용당하고 혼자 벽장 안에 갇힌 채 소원을 빕니다. 그냥 30살이 되고 싶다고. 다음 날 눈을 뜨니 정말로 30살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 그 마음을 정확히 이해합니다. 어른이 되면 누가 시키는 대로 살지 않아도 되고, 통금도 없고, 돈도 제가 벌어서 제가 쓸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어른이 되어 보니 자유 대신 책임만 한 트럭씩 따라왔습니다. 요즘은 자꾸 거꾸로입니다. 학교 끝나고 친구랑 떡볶이 먹는 게 인생 최대 고민이던 그 시절이 너무 그립습니다.
영화는 그 감정을 정확하게 건드립니다. 30살의 제나는 유명 패션 잡지의 에디터로 근사한 아파트에 살고 멋진 남자친구까지 곁에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완벽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달랐습니다. 동료의 아이디어를 가로채고, 가족과 연락을 끊고, 친구라 믿었던 루시는 제나의 자리를 빼앗으려 험담을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인기(adulthood)가 되면 자율성과 함께 성숙함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그 둘은 전혀 세트가 아닙니다. 성인기란 법적으로 만 18세 이후의 시기를 뜻하지만, 심리적 성숙은 나이와 별개로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른의 현실
영화에서 저를 가장 사로잡은 장면은 역시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군무 장면입니다. 긴장한 30살 제나가 회사 파티에서 분위기를 살리려 13살 때 외웠던 안무를 꺼내드는 장면인데, 처음엔 어색하다가 단짝 매트가 등장하면서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추고 파티장 전체가 따라 춥니다. 이 장면이 단순한 개그로 끝나지 않는 건, 그 춤이 두 사람의 유일하게 순수했던 시간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솔직히 영화에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즉 인물이 이야기 안에서 변화하고 성장하는 서사 곡선의 측면에서 보면, 30살 제나가 다소 과하게 나쁜 어른으로 그려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동료 아이디어 도용, 부하 직원 남편과의 불륜까지. 13살의 순수함과 대비시키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어른이 된다고 해서 다 그렇게 변하지는 않습니다. 어른이 되는 게 곧 타락은 아니라는 점에서, 영화의 메시지가 다소 1차원적으로 느껴지는 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자꾸 회자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래는 제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감정적으로 유효한 장면들입니다.
- 매트가 생일 선물로 직접 만든 바비 인형의 집을 들고 가장 먼저 파티에 도착하는 장면
- 제나가 어린 시절 먹던 색소 사탕을 다시 먹으며 두 사람이 웃음을 되찾는 장면
- 소원 가루가 흩날리며 13살 생일날로 되돌아가는 마지막 장면
이 세 장면은 모두 돈이나 직함과는 무관합니다. 그게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것의 전부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감정을 노스탤지어(nostalgia)로 설명합니다. 노스탤지어란 과거의 긍정적인 기억을 그리워하는 정서 반응으로, 현재의 불안과 외로움을 완충하는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노스탤지어가 심리적 안녕감과 사회적 연결감을 강화한다는 연구 결과가 보고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이 영화가 가볍게 볼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임에도 보고 나면 묵직한 게 남는 이유가 바로 이 노스탤지어 효과 때문일 겁니다.
진짜 행복
영화의 후반부에서 제나는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며 방향을 완전히 바꿉니다. 잡지의 새 콘셉트로 화려한 트렌드 대신 소소하고 진짜인 순간들을 담아내려 하고, 매트에게 사진작가가 되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이 장면이 저는 가장 좋았습니다. 미디어 업계에서 편집 방향성(editorial direction)이란 매체가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핵심 가치와 메시지를 결정하는 기준을 말합니다. 제나가 그걸 바꾸는 건 단순한 직업적 선택이 아니라,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다시 정하는 행위였습니다.
제가 직접 이 영화를 여러 번 보면서 느낀 건, 이 영화는 인생 점검용으로 최적화되어 있다는 겁니다. 너무 무겁지 않게, 그러면서도 한 번쯤 제 삶의 방향을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가 흔치 않습니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감정적 리얼리즘(emotional realism), 즉 현실적으로 공감 가능한 감정 묘사를 얼마나 설득력 있게 구현하느냐가 작품의 깊이를 결정합니다. 이 영화는 그 지점에서 꽤 잘 해냈다고 봅니다.
미국영화연구소(AFI)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정서적 회복력(emotional resilience)을 다루는 서사 형식으로 분류합니다. 정서적 회복력이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인 감정 균형을 유지하고 다시 일어서는 심리적 능력을 뜻합니다(출처: American Film Institute). 이 영화가 단순한 오락물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이 영화가 말하는 건 단순합니다. 어른이 되어서 가져야 할 건 부나 명예가 아니라, 13살의 자신이 지금의 나를 봐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마음이라는 것. 저는 그 단순한 진실이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방향을 잃은 것 같은 날, 13살의 나를 한 번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길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날이 생기면 이 영화를 다시 꺼내보시길 권합니다. 단, 각오는 하셔야 합니다. 생각보다 꽤 많은 게 찔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