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대 머리맡에 콜린 퍼스 포스터를 붙여두고 살았던 시절이 있습니다. 책장에는 제인 오스틴 전집이 꽂혀 있는데, 겉은 빳빳해 보여도 속은 다 닳도록 읽은 것들이었습니다. 그 시절 저한테 '오스틴랜드'라는 영화는 그냥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저를 들여다본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로맨스 판타지
솔직히 처음엔 좀 가볍게 봤습니다. 전 재산을 털어서 19세기 영국 귀족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몰입형 롤플레이(Immersive Role-play) 테마파크에 가는 여자 이야기라니, 어디서 유치한 코미디 아닌가 싶었습니다. 여기서 몰입형 롤플레이란, 배우와 참여자가 함께 실제 공간 안에서 특정 시대와 세계관을 살아가는 체험 방식을 말합니다. 단순한 관람이 아니라 직접 그 안에 들어가 살아보는 것입니다.
주인공 제인은 13살 때부터 오만과 편견 첫 세 장을 외울 정도로 제인 오스틴에 심취한 인물입니다. 그녀는 근사한 휴가 대신 오스틴랜드에 가기 위해 돈을 모읍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보니 현실은 좀 다릅니다. 기본 요금으로는 가장 작고 초라한 방이 배정되고, 운영 측은 입장과 동시에 현대적인 불복종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명시합니다. 쉽게 말해 19세기 숙녀답지 않은 행동은 퇴장 사유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 설정 자체가 이미 흥미롭습니다. 우리가 어떤 세계에 '들어가기로' 결심했을 때, 그 세계의 규칙을 어디까지 따를 수 있는가. 제인이 겪는 갈등은 거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진짜 사랑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무서웠던 건 따로 있었습니다. 혹시 마지막에 "다 가짜였어, 사기당한 거야" 하고 끝나버리면 어떡하나, 싶었습니다. 그랬다면 너무 잔인한 결말이었을 것입니다.
영화 후반부를 이끄는 핵심 질문은 딱 하나입니다. 제인이 마음이 쏠리기 시작한 헨리 노블리, 그 사람의 감정이 진심인지 아니면 오스틴랜드라는 퍼포먼스(Performance)의 일부인지입니다. 여기서 퍼포먼스란 배우가 맡은 역할에 따라 수행하는 연기적 행동 전반을 의미합니다. 노블리가 제인에게 다가오는 모든 순간이 연출인지 감정인지 알 수 없다는 것, 그게 제인을 미로 속에 가둡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이 장면들이 남달리 와닿았습니다. 상대가 진심인지 아닌지 판단이 안 설 때, 사람은 굉장히 자기 파괴적인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제인도 그랬습니다. 밤이 깊어질수록 그녀는 스스로를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 짓고, 행복한 결말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감정의 흐름이 너무 사실적이어서 보는 내내 답답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 상태를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고 부릅니다. 인지 부조화란 자신이 믿고 싶은 것과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불편감을 말하는데, 제인이 가짜 공간에서 진짜 감정을 느끼면서 겪는 혼란이 정확히 이 상태입니다.
이미지 착각
이 영화가 짚고 가는 핵심은 생각보다 날카롭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 중 상당수는 실제 사람이 아니라 어떤 이미지를 향한 감정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인이 오스틴랜드에 간 이유 자체가 그렇습니다. 책 속의 다아시, 화면 속의 콜린 퍼스, 19세기 신사라는 이미지에 오랫동안 마음을 줬던 겁니다. 그게 잘못된 건 아닙니다. 다만 문제는 그 이미지만 좇다 보면 실제 앞에 있는 사람을 보는 눈이 흐려진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오래 그런 식으로 살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꽤 솔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코르셋과 무도회와 정중한 청혼이라는 포장을 다 걷어냈을 때 남는 사람을, 그때도 좋아할 수 있는가. 제인이 결국 선택하는 방향이 그 답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이상화된 대상(Idealized Object)에 대해 실제 관계보다 강렬한 감정적 애착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습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이상화된 대상이란 실제 상호작용 없이 일방적으로 투영된 이미지나 상징을 뜻합니다. 오스틴랜드라는 공간 자체가 그 이상화를 체험시켜주는 장치인 셈입니다.
이 영화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몰입형 체험이라는 장치가 주인공의 자아 인식 문제를 드러내는 방식
- 진심과 연기 사이에서 흔들리는 감정이 얼마나 사실적으로 묘사되는가
- 이미지 착각에서 벗어나 실제 사람을 보는 과정이 영화의 진짜 서사라는 것
호불호
제가 직접 봐서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영화는 분명히 호불호가 갈립니다. 제인 오스틴 세계관에 전혀 관심 없는 분들한테는 전개 속도도 빠르고 감정선도 다소 가볍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한 박자 빠르게 사랑에 빠지고 한 박자 빠르게 오해하는 리듬이 반복됩니다.
특히 제인이 최종적으로 어떤 남자를 선택하는지, 그 결정 과정이 충분히 설득력 있게 그려지지 않는다는 후기가 많습니다. 저도 좀 그랬습니다. 서사적 개연성(Narrative Plausibility)이 다소 약하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서사적 개연성이란 이야기 안에서 인물의 행동과 감정 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정도를 뜻합니다. 두 남자 중 왜 그 남자인가, 하는 의문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엔딩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영화가 끝나고 한참 멍하게 있었습니다. "이미지가 아닌 사람을 보라"는 메시지가 코르셋 입고 무도회 하는 우스꽝스러운 장면들 사이에서 조용히, 그러나 꽤 세게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이 정도 밀도의 주제 의식을 담는 건 쉽지 않습니다. 영국 문화원 자료에 따르면 제인 오스틴 원작은 현재까지도 전 세계에서 꾸준히 리메이크되며 대중문화 콘텐츠의 원형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출처: British Council). 오스틴랜드도 그 계보 위에서 꽤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입니다.
제인 오스틴 팬이라면 한 번쯤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팬이 아니라도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한 게 혹시 이미지였을까"라는 질문이 마음 어딘가에 걸려 있는 분이라면 볼 이유가 있습니다. 가볍게 틀었다가 생각지 못한 지점에서 멈추게 되는 영화입니다. 가끔은 영화가 현실보다 다정해서 좋다는 걸, 이 영화 보고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