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처음엔 그냥 가볍게 보려고 틀었습니다. 메릴 스트립 나오는 로맨스 정도겠거니 했는데, 영화가 시작하고 10분도 안 돼서 자세를 고쳐 앉게 됐습니다. 37살 라피가 상담사한테 새 남자친구 얘기를 풀어놓는데, 그걸 듣는 상담사 리사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가는 장면. 그게 이 영화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나이차이
14살이라는 나이 차. 숫자로만 보면 꽤 크다 싶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는 그 숫자 자체보다 그게 만들어내는 심리적 거리가 더 문제라는 걸 느꼈습니다. 23살 데이브는 미술 학교를 막 나온 청년이고, 37살 라피는 이혼을 정리하며 새 출발을 준비하는 커리어우먼입니다. 같은 시간대에 살지만 인생의 전혀 다른 챕터에 서 있는 두 사람이죠.
심리학에서는 이런 관계를 분석할 때 발달단계(Developmental Stage)라는 개념을 씁니다. 여기서 발달단계란 인간이 나이와 경험에 따라 서로 다른 심리적 과제와 욕구를 가지게 된다는 이론으로, 에릭 에릭슨이 체계화한 개념입니다. 쉽게 말해, 23살은 '나는 누구인가'를 찾아가는 시기고 37살은 '나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시기라는 겁니다. 라피가 결혼과 안정을 원하고 데이브가 아직 자기 인생도 다 못 챙기는 건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 발달단계의 차이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제가 직접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마음에 걸렸던 장면이 바로 그 부분이었습니다. 둘이 함께 웃고 밥 먹고 영화 볼 때는 14살 차이가 전혀 안 느껴지는데, 미래 얘기가 나오는 순간 갑자기 두 사람 사이에 유리벽이 생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유리벽이 사랑으로 부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영화는 꽤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상담사와 엄마
이 영화에서 제가 예상 밖이었던 건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리사의 포지션이었습니다. 라피의 정신과 상담사이면서 동시에 데이브의 어머니. 이 설정이 처음엔 좀 억지스럽지 않나 싶었는데, 보다 보니 이 구조 덕분에 영화가 훨씬 입체적으로 읽혔습니다.
정신과 상담 윤리에서는 이중 관계(Dual Relationship)를 엄격하게 금지합니다. 여기서 이중 관계란 상담사가 내담자와 치료 관계 외의 다른 관계, 예를 들어 가족이나 친구, 사업 파트너 같은 관계를 동시에 맺는 상황을 뜻합니다. 미국심리학회(APA)는 이를 전문직 윤리 위반으로 규정하고 있는데(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리사가 결국 상담을 종료하기로 결단을 내리는 장면은 이 윤리 원칙을 충실히 따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근데 영화가 흥미로운 건, 리사가 상담사로서 옳은 결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정이 엄마로서는 아들의 반감을 사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제 경험상 어떤 관계에서든 '역할 충돌'이 생기면 어느 쪽을 택해도 상처가 남더라고요. 리사가 딱 그랬습니다. 메릴 스트립이 그 복잡한 감정을 대사 한 마디 없이 표정 하나로 전달하는 장면들이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현실연애
영화 속 라피와 데이브를 보면서 계속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사랑이 충분히 크면 현실의 무게를 이길 수 있을까요?
제가 내린 결론은 이겁니다. 사랑이 그 무게보다 크게 느껴지는 동안엔 모든 게 작아 보이고, 사랑이 그 무게보다 작아지는 순간 모든 게 거대해 보입니다. 라피와 데이브도 처음엔 분명 전자였을 겁니다. 함께 있을 때는 나이 차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을 테니까요. 하지만 데이브가 집을 잃고 라피의 집에 얹혀 살게 되면서부터 그 무게는 조금씩 커집니다.
연애 관계에서 발생하는 현실적 갈등을 연구한 자료를 보면, 경제적 불균형과 생애주기(Life Cycle)의 불일치가 장기 관계 유지에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한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여기서 생애주기란 개인이 살아가면서 겪는 주요 사건들, 취업, 결혼, 출산, 노후 준비 등의 순서와 시기를 뜻합니다(출처: 한국가족관계학회). 라피는 이미 결혼과 이혼을 경험했고 다시 안정을 원하는 단계인 반면, 데이브는 이제 막 자기 커리어를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두 사람이 사랑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인생의 시계가 다른 속도로 가고 있었던 거죠.
라피와 데이브의 관계에서 제가 더 씁쓸하게 느꼈던 건 다음 세 가지였습니다.
- 주변의 시선이 두 사람의 관계를 처음부터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는 것
- 데이브가 라피의 도움으로 데뷔하고 새 집까지 마련했음에도 이별을 피하지 못했다는 것
- 그 이별이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서로의 자리가 달라서였다는 것
그게 가장 안타까웠습니다. 불충분한 사랑이 아니라 충분한 사랑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져야 했으니까요.
이별의 의미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멍했습니다. 결말이 해피엔딩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한 비극도 아니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1년 후 재회 장면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눈인사 하나가 이 영화의 진짜 마지막 문장처럼 느껴졌습니다.
제 솔직한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이별은 실패가 아닙니다. 연애의 내러티브(Narrative), 즉 사랑의 이야기 구조는 반드시 결합으로 끝나야 완성된다는 통념이 있는데, 이 영화는 그걸 조용히 반박합니다.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해본 시간 자체가 이미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라는 거죠.
다만 영화가 아쉬웠던 부분도 있습니다. 라피의 감정선은 꽤 세밀하게 따라가는데, 데이브의 내면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처리됩니다. 23살 청년이 14살 연상의 여성과 사랑하면서 느꼈을 두려움이나 불안, 혹은 설렘 같은 감정들이 영화 안에서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관계가 끝나는 이유가 결국 데이브의 미숙함 탓으로 귀결되는 것처럼 읽히는 지점이 있어서, 데이브 입장에선 좀 억울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래도 이 영화가 마지막에 남기는 온도는 따뜻합니다. 헤어진 후에도 라피가 데이브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것, 그 사랑이 끝났어도 그게 틀린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 그걸 표정 하나로 전달하는 메릴 스트립의 연기 덕분에, 영화는 꽤 오랫동안 마음에 남습니다.
연애란 결국, 우리 둘은 다를 줄 알았는데 사실 우리도 별 거 없었다는 걸 알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라피와 데이브도 그렇게 서로를 알아갔고, 그 시간이 실패가 아니었다는 걸 이 영화는 조용히 증명합니다. 비슷한 상황에서 갈등하고 있다면, 한번쯤 이 영화를 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