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이 안 풀리는 이유가 상대방 탓이라고 생각한 적 있으신가요.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서 그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타이밍이었습니다. 영화 '윌 아이 엠'은 그 불편한 진실을 꽤 정직하게 보여줍니다.
이혼 서류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은 날, 아빠가 딸을 데리러 학교에 갑니다. 차 안에서 딸이 묻습니다. "아빠, 엄마랑 어떻게 만났어?" 보통 아빠라면 짧게 대답하고 넘겼을 텐데, 윌은 작정하고 풀기 시작합니다. 자기가 살면서 사랑했던 여자 세 명 이야기를. 단, 누가 엄마인지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딸 마야가 직접 맞춰야 합니다.
영화는 이 구조 자체로 이미 절반은 먹고 들어갑니다. 보는 사람도 같이 추리하게 되니까요. 저도 보는 내내 "얘가 엄마인가, 쟤가 엄마인가" 하면서 집중했는데, 이게 단순한 장치가 아니라 윌이라는 사람의 감정 역사를 따라가게 만드는 장치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세 여자는 성격도, 윌과의 관계 방식도 전부 다릅니다. 첫사랑 에밀리는 멀리서도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고, 작가 서머는 강렬하게 끌렸지만 신념 앞에서 관계보다 자신을 택한 사람입니다. 에이프릴은 처음엔 그냥 직장 동료였고, 친구였고, 그러다 가장 오래 곁에 남은 사람이 됩니다. 세 명 다 제각각의 이유로 기억에 남습니다.
타이밍
영화에서 제일 뼈아프게 느껴진 부분이 있습니다. 에이프릴이 윌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장면인데, 하필 그 타이밍이 서머와 사랑이 막 무르익으려던 순간입니다. 이걸 보면서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사람이 나쁜 게 아닙니다. 둘 다 진심인데, 그냥 시기가 안 맞은 겁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기회비용적 의사결정(opportunity cost decision-making)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기회비용이란, 어떤 선택을 할 때 포기해야 하는 다른 선택의 가치를 의미합니다. 사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 곁에 있는 동안은 다른 사람을 온전히 볼 수 없습니다. 눈앞에 있어도 못 보는 게 아니라, 못 볼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겁니다.
제 경험상 이건 실제로 훨씬 흔한 일입니다. 십 대에 만났으면 절대 안 맞았을 사람이 삼십 대에 만나면 딱 맞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대로 너무 일찍 만나서 그 사람의 진가를 못 알아보는 경우도 있고요. 윌이 에이프릴을 몇 년 동안 친구로만 본 것처럼. 한참 옆에 있었는데 못 봤던 겁니다. 그게 보고 나면 진짜 슬픕니다.
실제로 관계 심리 연구에서도 "친밀감 형성 속도(rapport building speed)"가 관계 만족도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결과가 있습니다. 여기서 rapport란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되는 신뢰와 정서적 연결감을 의미합니다. 친구로 쌓은 시간이 결국 가장 단단한 바탕이 된다는 뜻이기도 한데, 윌과 에이프릴의 관계가 딱 그 사례입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APA)).
해피엔딩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저는 솔직히 웃어버렸습니다. 어린 딸 마야가 아빠 손을 잡고 에이프릴 집 앞으로 데려갑니다. 다시 가서 두드려보라고. 이게 이렇게 미국 영화구나, 싶었습니다.
한국 정서였으면 어땠을까요. "지나간 사람을 왜 또 찾아가, 자존심도 없냐" 하고 끝났을 겁니다. 그런데 미국 서사에서는 다릅니다. 끝난 것 같아도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려보는 거, 안 열리면 그때 돌아서면 된다는 태도가 자연스럽게 등장합니다.
처음엔 비현실적이라고 웃었는데, 곱씹어보니 부럽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한 번 끝난 일을 너무 빨리 묻습니다. 다시 가면 자존심 상한다고, "이미 늦었다"고 자기한테 먼저 선언해버립니다. 그런데 그 '늦었다'는 걸 누가 정한 건가요. 마음만 살아있으면 사실 안 늦은 건데요.
서사 구조 측면에서 보면, 이 영화는 내러티브 클로저(narrative closure), 즉 이야기가 감정적으로 완결되는 방식을 관객이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만들어서 처리합니다. 여기서 내러티브 클로저란 관객이 이야기의 결말에서 심리적 해소감을 얻는 경험을 말합니다. 마야가 엄마를 찾아가는 구조와, 윌이 에이프릴에게 다시 가는 구조가 이중으로 겹치면서 해소감을 두 배로 만드는 거죠. 영화적으로 꽤 잘 짜인 구성입니다.
다만 걸리는 부분도 있습니다. 아홉 살 아이한테 아빠의 연애사 세 편을 자세히 풀어주는 설정은 아무리 봐도 좀 묘합니다.
- 아이가 감당하기엔 정서적으로 무거운 내용을 너무 덤덤하게 받아냅니다.
- 마야의 반응이 또래 아이 같지 않고 어른스러워서 공감보다 낯섦이 먼저 옵니다.
- 서양 영화 특유의 '조숙한 아이 캐릭터' 설정인데, 익숙하지 않으면 살짝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런 설정이 불편하다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으니까요.
사랑
영화를 보고 나서 한 가지 결심이 들었습니다. 누군가 마음에 들어오면 망설이지 말고 진심을 던져보자고요. 뒤늦게 알아챈 사랑이 제일 아프다는 걸, 이 영화가 꽤 정확하게 보여줬습니다.
심리학 용어로는 이를 인지적 편향(cognitive bias) 중 하나인 사후확신편향(hindsight bias)과 연결 지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사후확신편향이란, 어떤 일이 일어난 후에 "그때 알았어야 했는데"라고 느끼는 심리 현상을 말합니다. 감정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관계가 끝나고 나서야 "그 사람이 맞았는데"를 깨닫는 것,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본 감각이지 않으신가요(출처: 미국심리학회(APA)).
제가 직접 이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감정이 완벽한 타이밍에 오기를 기다리다가는 영원히 못 한다는 겁니다. 윌이 에이프릴에게 다가간 게 너무 늦었냐고요. 극 중에서도 한 번 실망을 줬고, 다시 찾아갔을 때도 처음엔 문전박대를 당합니다. 그런데도 진심을 전했습니다. 시도하다 망하는 게 못 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걸, 윌이 먼저 알아차린 겁니다.
이 영화는 사랑이 어려운 이유를 잘못된 사람 탓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그냥 시기의 문제라고, 그리고 그 시기를 알아챘을 때 움직일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 메시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볼 만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사랑 때문에 어딘가 뭔가가 걸려있는 분이라면, 한 번쯤 틀어보시길 권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걸 건드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