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정 드라마라면 으레 변호사가 주인공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법학 학위도, 인맥도, 심지어 변변한 직장도 없던 한 싱글맘이 미국 역사상 가장 큰 환경 소송 합의금을 받아냈습니다. 학력과 자격증이 전부라고 믿었던 제 편견이 이 영화 한 편에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싱글맘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에린 브로코비치〉는 2000년에 개봉한 법정 드라마로, 1992년 캘리포니아 힝클리(Hinkley)에서 실제로 벌어진 환경 오염 사건을 바탕으로 합니다. 세 아이를 혼자 키우던 에린(줄리아 로버츠)은 병원 취업 면접에서 고배를 마시고, 교통사고 후 찾아간 법률 사무소에서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바람에 재판마저 불리하게 끝납니다. 생활고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그녀는 결국 에드의 변호사 사무소에 사무 보조로 취직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류의 실화 영화는 처음부터 주인공에게 뚜렷한 능력이나 배경이 있는 것처럼 그려진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가 직접 보니 에린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영화 초반 그녀는 아이들에게 배불리 먹이고 자신은 커피 한 잔으로 끼니를 때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장면 하나가 이후 그녀의 모든 분투를 설명해 주는 것 같아서,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에린이 부동산 서류를 검토하다 수상한 점을 발견하고 힝클리 주민 젠슨 부부를 찾아가는 장면에서 사건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PG&E(Pacific Gas and Electric Company), 즉 캘리포니아의 거대 전력 회사가 주민들의 의료비를 전액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의혹을 키웠고, 에린은 UCLA 프란켈 교수를 찾아가 크롬(Chromium) 오염에 대한 설명을 듣습니다. 여기서 크롬이란 금속 원소의 일종으로, 산업 공정에서 사용되는 육가크롬(Hexavalent Chromium, Cr-VI)은 발암 물질로 분류되며 지하수를 오염시킬 경우 인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칩니다.
600명의 이름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깊이 남은 장면은 에린이 600명이 넘는 소송 원고들의 이름, 전화번호, 가족 관계, 병력을 통째로 외우고 있는 장면입니다. 같은 사무실의 변호사조차 서류를 뒤져야 답할 수 있는 정보를, 그녀는 막힘없이 말합니다. 이게 단순한 암기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저는 알았습니다. 한 집 한 집 직접 발로 찾아다니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 소송에서 핵심 쟁점은 직접 소송(Direct Litigation)과 중재(Arbitration) 중 어느 방식으로 진행하느냐였습니다. 직접 소송이란 법원에서 배심원단을 포함한 정식 재판을 통해 판결을 받는 방식이고, 중재란 배심원 없이 제3의 중재인이 보상액을 결정하는 절차를 말합니다. PG&E 측은 빠른 합의를 유도하기 위해 중재를 원했고, 에린은 주민들이 중재 절차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불리한 합의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해 강하게 반대합니다.
소송의 분수령은 PG&E 본사가 힝클리 지역의 수질 오염 사실을 인지하고도 의도적으로 은폐했다는 내부 증거를 확보하는 일이었습니다. 에린 주위를 맴돌던 한 전직 PG&E 직원이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감독관이 관련 문서들을 파기하라고 지시했다는 내부 고발(Whistleblowing)을 합니다. 여기서 내부 고발이란 조직 구성원이 조직 내부의 불법 행위나 비리를 외부에 공개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이 증언이 없었다면 PG&E 본사와 힝클리 사건 사이의 연결고리를 입증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에린의 분투가 실화에 기반한다는 점은 영화의 무게를 배로 늘립니다. 미국 환경보호청(EPA)에 따르면 육가크롬은 흡입이나 섭취 시 폐암, 위장암 등을 유발할 수 있는 1급 발암 물질로 규정되어 있습니다(출처: 미국 환경보호청(EPA)). 힝클리 주민들이 겪은 백혈병과 각종 암이 단순한 불운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이 영화를 보며 에린이 지켜낸 것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법률 전문 자격 없이 직접 증거를 수집하고 주민을 설득하는 실무 역량
- 협박 전화에도 굴하지 않고 조사를 이어간 지속성
- 600명 원고 한 명 한 명의 사정을 기억하는 관계 중심의 신뢰 구축
- PG&E 내부 문서 파기 지시라는 결정적 증거 확보
소송
1996년 최종 합의금은 3억 3천 3백만 달러로, 당시 미국 직접 소송 역사상 최고 합의금이었습니다. 줄리아 로버츠는 이 역할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비롯해 골든글로브 등 주요 시상식을 석권했고, 여성 배우 최초로 출연료 2천만 달러를 받은 것도 화제가 되었습니다. 제작비 5천 2백만 달러 대비 총 2억 5천 6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흥행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출처: Box Office Mojo).
제 경험상 이 영화는 단순한 승소 서사로 소비하기엔 아쉬운 지점이 있습니다. 에린의 분투에 카메라가 집중되는 만큼, 정작 힝클리 주민들 개개인의 고통은 서사의 배경으로 밀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백혈병과 암으로 시달리던 이들의 목소리가 에린의 영웅 서사를 빛내는 장치처럼 소비된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어 온 것도 이 때문입니다. 또한 영화는 합의로 막을 내리지만, PG&E가 이후에도 동일 지역에서 추가 오염 의혹을 받아왔다는 사실은 거의 다뤄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25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한 이유는, 한 사람의 진심과 끈기가 거대한 시스템에 균열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실제 기록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스펙이나 배경이 없어도, 자신이 맡은 일을 끝까지 책임지려는 태도가 결국 디테일에서 판가름 난다는 것을 에린은 몸으로 증명했습니다. 오늘 하루가 버겁게 느껴질 때 한 번쯤 다시 꺼내 보고 싶은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