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한 번쯤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 저도 그랬습니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하던 어느 날, 문득 이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2006년 개봉작임에도 불구하고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를 담고 있는 데이비드 프랭클 감독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직접 여러 번 다시 보고 나서야 이 영화가 얼마나 복잡한 질문을 던지는지 실감했습니다.
패션계 현실
저널리스트를 꿈꾸는 앤드리아(앤 해서웨이)가 세계 최고 패션지 '런웨이'의 편집장 미란다 프리슬리(메릴 스트립)의 어시스턴트로 취직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노스웨스턴 대학교를 갓 졸업한 신입이, 수백만 명의 여자들이 탐낼 자리라고 불리는 곳에 들어서는 장면은 솔직히 처음 봤을 때 약간 설레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영화가 펼쳐지면, 그 선망의 자리가 얼마나 살벌한 환경인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허리케인으로 모든 항공편이 결항된 상황에서도 "마이애미에서 뉴욕행 비행기를 구해오라"는 지시가 떨어집니다. 캘빈 클라인 스커트 10~15벌을 당장 준비하거나, 미출간 해리포터 원고를 쌍둥이를 위해 구해오는 일도 앤드리아의 몫입니다.
이 영화의 원작은 실제로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 아래에서 일한 로런 와이스버거의 자전적 소설입니다. 패션 저널리즘(fashion journalism) 분야, 즉 패션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언론·미디어 산업 종사자들이 이 영화를 보고 "오히려 현실을 순화해서 담았다"고 증언했다는 점이 더 무겁게 다가옵니다. 제가 직접 여러 인터뷰 자료들을 찾아봤을 때도, 당시 업계 내 위계 문화와 극도로 높은 업무 강도는 영화 속 묘사보다 훨씬 가혹했다는 이야기가 반복해서 나왔습니다.
패션 산업에서 하이패션(high fashion)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오트쿠튀르(haute couture)라고도 불리는 최고급 맞춤 의상 중심의 업계를 가리키는 말로, 단순한 옷 그 이상의 문화적 권력이 집중된 세계입니다. 그 정점에 있는 〈보그〉 같은 패션 매거진이 어떤 위계로 돌아가는지, 이 영화는 꽤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세룰리안 블루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단연 '세룰리안 블루' 대사 장면입니다. 앤드리아가 두 개의 벨트를 놓고 "똑같아 보이는데요"라고 말하자, 미란다가 차갑게 그녀의 무지를 지적하는 장면입니다. 직접 겪어보니, 어떤 분야든 전문가의 눈과 초보자의 눈이 같은 대상을 완전히 다르게 본다는 걸 이 장면만큼 명쾌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없었습니다.
미란다는 앤드리아의 스웨터 색상이 세룰리안 블루임을 짚으며, 그 색이 오스카 드 라 렌타의 런웨이에서 시작해 수년간 패션 사이클(fashion cycle)을 거쳐 대중에게 퍼졌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패션 사이클이란, 특정 트렌드가 하이패션에서 시작해 리테일, 대형 유통망을 거쳐 일반 소비자에게 도달하기까지의 전파 흐름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패션에 관심 없다고 생각한 앤드리아조차 이미 패션 산업의 영향 아래 있었다는 역설이 이 장면에서 터집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내가 당연하게 소비하는 것들의 배경을 얼마나 알고 있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소비자 행동 연구에 따르면, 트렌드는 특정 오피니언 리더(opinion leader)에서 시작해 매스마켓으로 확산되는 하향식 구조를 따릅니다. 오피니언 리더란, 소비 문화에서 타인의 구매 결정이나 취향에 영향을 미치는 선도적 개인을 의미합니다. 미란다가 설명하는 세룰리안 블루의 역사가 정확히 이 구조입니다(출처: 한국소비자원).
이 영화가 패션계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단순한 패션 영화로 소비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옷 이야기를 하면서 실제로는 권력, 영향력, 그리고 우리가 '취향'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어디서 만들어지는지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에서 주목할 만한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하이패션이 일반 소비 시장에 미치는 트렌드 전파 구조를 시각적으로 보여줌
- 앤드리아가 '패션과 무관하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이미 그 안에 있었다는 아이러니
- 미란다의 대사가 단순한 비판이 아닌, 업계 전문성과 맥락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선언
- 세룰리안 블루 장면이 지금도 패션 교육에서 인용될 만큼 상징성을 지님
커리어 딜레마
앤드리아는 영화 중반 이후 점점 달라집니다. 샤넬 옷을 입고, 미란다의 불가능한 미션들을 척척 해결하면서 그녀는 진짜 '런웨이 걸'이 되어갑니다. 그리고 이 변화가 남자친구, 친구들과의 관계를 갉아먹기 시작합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를 처음 볼 때는 "성공하는 앤드리아"가 좋아 보였는데, 다시 보니 그 성장이 동시에 상실의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영화가 오래도록 회자되는 진짜 이유가 드러납니다. '미란다가 악마인가, 앤드리아가 프로답지 못한 것인가'라는 재평가가 수년에 걸쳐 이어지고 있습니다. 처음엔 미란다가 일방적인 가해자처럼 보이지만, 다시 보면 그녀가 요구하는 것들이 실제로 '최고'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준이었다는 시각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워크-라이프 밸런스(work-life balance), 즉 일과 개인적 삶 사이의 균형 문제는 현대 직장인이라면 피할 수 없는 주제입니다. 한국고용정보원의 조사에 따르면, 국내 직장인 중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번아웃(burnout)을 경험한 비율이 절반을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출처: 한국고용정보원). 번아웃이란 과도한 업무나 감정 소모로 인해 신체적·정신적 에너지가 소진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앤드리아가 겪는 갈등이 공감을 얻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파리에서 앤드리아가 미란다의 자리를 지켜주고도 결국 미란다 옆을 떠나는 장면은, 제 경험상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성공을 손에 쥐는 방식이 자신이 되고 싶었던 사람과 충돌할 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앤드리아의 선택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미란다의 냉정한 팩스 한 장이 더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가장 실망스러웠지만 고용하지 않으면 바보'라는 그 문장이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낡지 않습니다. 패션이라는 화려한 외피 안에, 커리어와 자아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다시 볼 때마다 결론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꼭 한 번, 이미 보셨다면 지금 다시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직장 경험이 쌓인 지금의 눈으로 보면, 분명히 다른 장면들이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