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준비가 됐을 때 부모가 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영화 '아빠가 되는 중'은 그 사실을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저도 모르게 우리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고, 당연하게 여겼던 그 사랑이 사실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뒤늦게 실감했습니다.
아무도 준비된 채로 시작하지 않는다 — 싱글 대디의 출발점
영화의 주인공 맷은 아내를 잃은 슬픔을 추스를 틈도 없이 혼자 아이를 키워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처가에서는 함께 미네소타로 이주하자고 권했지만, 맷은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딸을 직접 키우겠다고 고집합니다.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보통이라면 기댈 곳을 선택하는 게 당연해 보이는데, 맷의 결정은 그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부성애(父性愛) 표현이었으니까요. 여기서 부성애란 단순히 자식을 사랑한다는 감정이 아니라, 아이의 삶을 책임지고 일상을 함께 구성하겠다는 의지와 실천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생각해보면 저도 제 부모님이 저를 키울 때 얼마나 두려웠을까 상상조차 못 했습니다. 부모님도 처음부터 부모였던 게 아니라, 저를 키우면서 같이 부모가 되어가셨을 텐데 그 시간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조금 가늠이 됐습니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한부모 가정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2023년 기준 국내 한부모 가구는 전체 가구의 약 8%에 해당합니다(출처: 통계청). 숫자로 보면 작아 보이지만, 그 안에 담긴 각각의 사연은 맷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기저귀도 뒤집어 채우는 아빠 — 육아 현실의 민낯
맷이 기저귀를 거꾸로 채우는 장면에서 극장 분위기가 잠깐 웃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웃고 나서 바로 뒤에 오는 감정이 씁쓸함이었습니다. 저도 조카를 잠깐 봐준 적이 있는데, 그때 느낀 건 아이 한 명을 단 두 시간 돌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맷이 겪는 육아는 감동적인 순간보다 지치고 당황하는 장면이 훨씬 많습니다. 직장에 아이를 데려가야 하는 상황, 아이의 울음을 도무지 멈출 수 없는 밤, 이런 장면들이 저는 오히려 더 현실감 있게 다가왔습니다. 육아 전문가들이 말하는 애착 형성(Attachment Formation)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 애착 형성이란 주 양육자와 아이 사이에 정서적 유대가 생기는 과정을 말하는데, 심리학자 존 볼비의 애착 이론에 따르면 이 과정은 완벽한 돌봄보다 일관된 반응과 정서적 존재감에서 만들어집니다. 맷이 서툰 아빠였음에도 딸 매디와 단단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맷이 보여주는 육아의 핵심 태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아이의 일상에 물리적으로 함께 존재하는 것
- 완벽한 해결책 대신, 아이의 감정을 먼저 인정하는 것
-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자리를 지키는 것
이 세 가지가 결국 서툰 아빠를 진짜 아빠로 만드는 과정이라는 걸, 영화는 극적 장치 없이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아이 한 명을 키우는 데 필요한 것 — 공동체와 육아 환경
영화에서 제가 가장 인상 깊게 본 부분은 맷 주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회사 동료, 친구, 가족이 발 벗고 나서서 육아를 함께 감당하는 장면들이 연속으로 나오는데, "아이 한 명을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실감나게 느껴졌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현실에서 저렇게까지 주변이 다 움직여주는 경우는 드물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조금 영화적 판타지처럼 느껴지는 설정이라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오히려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더 선명하게 만드는 장치라고 봤습니다.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공동체적 육아 지원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적으로 강조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실제로 공동 양육(Co-Parenting) 환경이 아이의 정서 발달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합니다. 공동 양육이란 법적 혼인 관계나 혈연을 넘어, 다수의 성인이 협력하여 아이의 양육에 참여하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아동 정서 발달과 사회적 지지 관계에 관한 연구들에 따르면, 안정적인 양육 지지망은 아이의 사회 정서 발달(Social-Emotional Development)에 유의미한 긍정 효과를 가져옵니다. 사회 정서 발달이란 아이가 감정을 인식하고 타인과 건강하게 관계 맺는 능력을 키워가는 과정입니다(출처: 육아정책연구소).
트라우마를 안고 앞으로 나아가는 법 — 아빠의 성장
맷에게 가장 힘든 장면은 아내를 잃었던 병원에 다시 가야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제가 직접 겪어보진 않았지만, 그 감각이 어떤 것일지 상상만으로도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트라우마(Trauma)란 심각한 심리적 충격이 이후의 일상적 반응과 감정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맷이 병원이라는 공간을 회피하는 것은 나약함이 아니라 그 정의에 완전히 부합하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럼에도 맷은 딸 매디를 위해 그 공간과 다시 마주하는 쪽을 택합니다. 제 경험상 이런 결단은 용기보다도 사랑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할머니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매디가 더 행복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고민하는 과정에서 맷은 비로소 아빠로서의 정체성(Parental Identity)을 완성해 갑니다. 여기서 양육 정체성이란 스스로를 부모로서 인식하고 그 역할을 적극적으로 내면화하는 심리적 과정입니다. 이 과정이 완성됐을 때, 맷은 더 이상 사고를 수습하는 아빠가 아니라 딸의 삶을 함께 설계하는 아빠가 됩니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묻는 것 같습니다. 부모라는 자리는 자격을 갖춘 후에 앉는 의자가 아니라, 앉고 나서 몸에 맞게 만들어가는 자리가 아닐까 하고요.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가까운 부모님께 연락 한 통 드리고 싶어집니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끝까지 자리를 지켜준 그 사람에게요. 저처럼 부모님의 희생을 당연하게만 여겼던 분들이라면, 이 영화가 그 감각을 새로 깨워주는 계기가 될 겁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가족과 함께 시청하시길 권합니다. 분명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하고 싶은 말이 생길 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