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 타임스 칼럼 '모던 러브'에 실렸던 실화들이 드라마 시리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알고 계셨습니까? 저는 이 시리즈를 처음 틀었을 때 한 편만 보고 자려고 했다가 결국 새벽 두 시가 넘도록 화면을 끄지 못했습니다. 거창한 사랑이 아니라 옆집 사람의 이야기 같아서 더 무서웠습니다.
위로
제가 이 시리즈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장면은 화려한 로맨스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뉴욕 어딘가, 늦은 밤 아파트 로비에 주인공이 주저앉아 웁니다. 데이트도 망했고 인생도 막막하고,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는 그 얼굴. 도어맨 구즈민이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딱 한 마디 합니다. "오늘은 푹 자. 내일은 또 새로운 날이야."
그 장면에서 코끝이 시큰해졌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는 드라마에서 위로를 받을 때 보통 긴 대사나 극적인 포옹 같은 걸 기대하는 편인데, 이 시리즈는 달랐습니다. 내 인생이 망한 것 같을 때 분석해주거나 충고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오늘 푹 자"라고 말해주는 사람. 그 단순함이 사실은 가장 따뜻한 위로라는 걸 이 장면이 조용히 증명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방식을 '비지시적 지지(non-directive support)'라고 부릅니다. 비지시적 지지란 상대방에게 해결책이나 방향을 제시하는 대신, 그 감정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정서적 반응을 의미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조언보다 공감을 먼저 필요로 하며, 실질적인 도움보다 감정적 수용이 심리적 회복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모던 러브〉가 특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시리즈는 '사랑은 연인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는 전제 자체를 조용히 허뭅니다. 도어맨과 세입자 사이에도, 나이 든 부부 사이에도, 오래전 파리에서 스친 두 사람 사이에도 사랑은 존재합니다.
옴니버스
이 시리즈는 옴니버스(omnibus)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옴니버스란 각각 독립된 이야기들이 하나의 주제 아래 묶인 구성 방식으로, 시청자가 매 편마다 새로운 인물과 상황을 만나게 되는 구조입니다. 총 8편으로 구성된 이 시리즈는 뉴욕 타임스에 실렸던 실화 칼럼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로맨스 드라마와 결이 다릅니다.
저는 옴니버스 형식의 드라마를 꽤 좋아하는 편이라 기대하고 봤는데, 이 시리즈에 대해서는 두 가지 시각이 모두 이해됩니다. 이 형식이 다채롭고 신선하다고 보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와 동시에 편 편마다 감정의 깊이가 달라서 집중도가 들쑥날쑥한 점도 분명히 느꼈습니다.
8편 중에서도 특히 마음에 박히는 편과 그렇지 않은 편의 편차가 꽤 큽니다. 저는 구즈민 도어맨 편과 조울증을 고백하는 어머니 이야기가 담긴 편을 보고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던 반면, 어떤 편은 다 보고 나서도 '아, 이런 이야기였구나' 정도에서 끝났습니다. 이건 제가 까다로운 게 아니라, 옴니버스 형식이 태생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입니다.
〈모던 러브〉에서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꼽으라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 도어맨 구즈민과 주인공의 이야기 — 사랑이 꼭 연인 사이가 아님을 보여주는 편
- 조울증을 고백하는 어머니 이야기 — 내면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편
- 나이 든 부부 켄과 마고의 이야기 — 늙어서도 사랑은 놀랍도록 풍요로울 수 있다는 걸 담은 편
또한 이 시리즈의 모든 이야기가 뉴욕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도시 중산층의 감수성이 강하게 투영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저는 그 부분이 살짝 아쉬웠습니다. 더 다양한 환경과 계층에서 벌어지는 사랑 이야기가 담겼더라면 시리즈의 외연이 훨씬 넓어졌을 것 같습니다.
사랑의 기억
이 시리즈를 다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남은 생각은 이겁니다. 우리가 어떤 시기를 지나고 있든, 과거에 누군가를 진짜로 사랑했던 기억과 누군가에게 진짜로 사랑받았던 기억은 오래도록 우리를 지탱한다는 것입니다.
힘든 날에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건 "넌 잘할 수 있어"라는 격려보다, 예전에 누군가가 한겨울에 내 손을 꼭 잡아줬던 그 감각이고, 내가 누군가를 위해 한참을 기다렸던 그 시간입니다. 그 관계가 끝났어도, 그 사람과 지금은 연락하지 않아도, 그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 안에 남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정서적 레퍼토리(emotional repertoire)'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정서적 레퍼토리란 한 사람이 살아오면서 경험한 감정의 총합이 내면에 축적되어, 이후의 삶에서 감정을 처리하고 회복하는 자원으로 작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받은 기억이 많을수록 역경 앞에서의 심리적 회복력, 즉 레질리언스(resilience)가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레질리언스란 어려운 상황에서 좌절하지 않고 원래 상태로 되돌아오는 정서적 탄력성을 뜻합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APA)).
제가 이 시리즈를 추천하고 싶은 사람은 거창한 사랑 이야기를 원하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내 삶이 좀 지루하거나 막막하게 느껴지는 분들, 사랑이라는 게 어디서 오는지 잘 모르겠는 분들에게 권합니다. 분명히 어느 한 편에서, 딱 한 장면에서 멈추게 될 겁니다. 그게 이 시리즈가 가진 힘입니다.
〈모던 러브〉는 결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매일의 작은 순간들로 만들어지고, 그 순간들이 쌓여서 한 사람의 인생을 끝까지 지켜준다고. 그 메시지 하나만으로도 저는 이 시리즈를 두고두고 다시 꺼내 볼 것 같습니다. 오늘 밤 뭔가 보고 싶은데 마음이 복잡하다면, 에피소드 한 편만 틀어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