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그냥 가볍게 웃고 넘길 코미디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뭔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라스트 홀리데이〉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평범한 백화점 직원이 남은 삶을 통째로 바꿔버리는 이야기입니다. 3~4번 돌려봤는데, 볼 때마다 처음 본 것처럼 웃고 뭉클해집니다.
시한부 판정
조지아 버드(퀸 라티파)는 백화점에서 일하는 평범한 판매원입니다. 예쁜 그릇을 사 모으고, 레시피를 스크랩하고, '언젠가'라는 이름의 서랍에 꿈들을 차곡차곡 쌓아두며 살아갑니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CT 촬영 결과가 날아옵니다. 림프절염과 다발성 종양, 치료 없이는 가망이 없다는 시한부 선고였습니다.
여기서 림프절염이란 림프절에 염증이 생기는 질환으로, 진행 상태에 따라 전신으로 전이될 수 있는 심각한 병변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영화 속 조지아의 경우처럼 다발성 종양과 결합되면 예후가 극도로 나쁜 진단으로 이어집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가장 눈길이 갔던 건 조지아의 표정이 아니라 그다음 행동이었습니다. 그녀는 무너지는 대신 IRA(개인퇴직연금계좌)를 전액 청산합니다. 여기서 IRA란 미국에서 노후를 위해 개인이 적립하는 세제 혜택 적용 퇴직 저축 계좌로, 쉽게 말해 평생 모은 노후 자금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 돈으로 유럽의 최고급 호텔 대통령 스위트룸을 예약하고, 스스로를 '국제 풍선 사업가'라고 소개하며 인생에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치를 시작합니다.
이 영화가 단순한 버킷리스트 무비와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버킷리스트(bucket list)란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의 목록을 뜻하는데, 많은 영화들이 이 목록을 채우는 과정 자체에 집중합니다. 반면 〈라스트 홀리데이〉는 목록이 아니라 태도의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조지아는 모든 걸 잃은 상태에서 오히려 진짜 자신을 찾아가고, 그 과정이 보는 내내 눈부시게 느껴집니다.
버킷리스트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저는 꽤 불편한 질문 하나를 오래 붙들고 있었습니다. "죽음이 임박해야만 용기를 낼 수 있는 건가?" 영화의 메시지는 따뜻하지만, 그 전제를 뒤집어 보면 꽤 씁쓸하기도 합니다.
조지아는 호텔에서 존경하던 셰프 디디에의 요리를 직접 맛보고, 스키를 우아하게 타며, 억눌렸던 감정들을 하나씩 꺼내놓습니다. 불륜 관계로 얽혀 있던 크레건 씨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자신에게 헛된 기대를 품게 했던 매튜에게도 "당신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제 경험상, 이런 장면들이 가장 카타르시스가 컸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참고 삭히는 말들을 그녀가 대신 뱉어주는 느낌이랄까요.
심리학에서는 이를 사후 조망 편향(hindsight bias)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사후 조망 편향이란 결과를 알고 난 뒤에 "그럴 줄 알았다"고 느끼는 인지 왜곡을 말하는데, 조지아의 변화는 오히려 "미리 결말을 알았을 때 행동이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죽음이라는 시한을 알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화가 던지는 또 다른 불편함도 있습니다. 조지아가 누리는 자유가 IRA 전액 청산이라는 경제적 기반 위에서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꿈을 이루는 데 결국 돈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의 경우, 2023년 기준 가구당 평균 노후 준비 자산은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분석도 있습니다(출처: 통계청). 조지아처럼 모든 걸 쏟아붓고 떠날 수 있는 사람이 현실에서 얼마나 될까, 생각하면 마냥 낭만적으로만 보기도 어렵습니다.
조지아가 꿈꾸던 것들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존경하는 셰프의 요리를 직접 먹어보는 것
- 스키를 자유롭게 타는 것
- 자신의 작은 식당을 열고 가정을 꾸리는 것
- 억눌렸던 감정과 관계를 정리하는 것
흥미로운 건, 이 목록 중 돈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사실 마지막 두 가지뿐이라는 점입니다. 감정을 정리하고 솔직해지는 데는 돈이 들지 않습니다.
삶의 태도
영화의 반전은 꽤 통쾌합니다. CAT 스캔(컴퓨터 단층 촬영 검사) 오류로 조지아가 오진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여기서 CAT 스캔이란 X선을 여러 각도에서 촬영한 뒤 컴퓨터로 재구성해 신체 내부를 입체적으로 보는 영상 진단 검사를 말합니다. 이 반전이 단순히 해피엔딩을 위한 장치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읽었습니다.
오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조지아는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용히 살면서 낭비했던 삶을 후회합니다. 죽음이 없어졌다고 해서 그녀가 호텔에서 경험한 것들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진짜 자신을 찾은 경험, 용기를 냈던 순간들은 그대로 남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진정으로 원하던 작은 식당을 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의 긍정심리학(positive psychology)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의미 있는 경험'을 쌓을 때 삶의 만족도가 가장 크게 올라간다고 합니다. 긍정심리학이란 행복과 인간의 강점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심리학의 한 분야입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 조지아가 호텔에서 쌓은 경험들이 바로 그 '의미 있는 순간들'이었고, 그게 오진이라는 반전 이후에도 그녀를 바꾼 이유라고 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이유도 결국 그 질문 때문입니다. 지금 저는 몇 개나 '나중에' 서랍에 넣어두고 있을까. 우울한 하루 끝에 이 영화를 다시 켜면 이상하게도 내일은 뭔가 다르게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힐링 영화라는 말로는 부족한, 조용한 각성의 영화입니다.
〈라스트 홀리데이〉는 어떻게 시작하느냐보다 어떻게 끝내느냐가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거창한 유럽 여행이 아니어도 됩니다. 오늘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오래 미뤄뒀던 사람에게 연락 한 통을 하는 것. 그 작은 선택들이 쌓여 결국 우리만의 '라스트 홀리데이'가 됩니다. 아직 '나중에' 서랍이 꽉 차 있다면, 지금 한 가지만 꺼내보는 건 어떨까요.